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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나신 날,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스승의 날’의 진짜 의미

Money Pie 2025. 5. 17.

안녕하세요. 오늘은 많은 분들이 모르고 지나쳤던

‘스승의 날’의 유래와 새롭게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세종대왕 나신 날’에 대해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이

스승의 날과 세종대왕의 생일의 관계를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두 날은 동일한 날짜, 5월 15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그 유래부터 최근 이슈, 그리고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념행사까지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드릴게요!

사진출처-시사매거진

🗓️ ‘스승의 날’의 유래는?

✅ 시작은 1958년 충남의 한 여고

스승의 날은 처음엔 병중에 있던 선생님을 제자들이 찾아뵙고 위로한 행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따뜻한 마음이 확산되면서 1964년 ‘은사의 날’로 불렸고,

이듬해인 1965년부터 세종대왕의 생일인 5월 15일에 맞춰

‘스승의 날’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 왜 하필 세종대왕?

한글을 창제하고 백성에게 가르침을 전한 세종대왕은

‘겨레의 스승’으로 불립니다.

그 정신을 기리고자 가르침의 상징인 세종대왕의 생일을 스승의 날로 삼은 것입니다.

👑 2025년부터는 ‘세종대왕 나신 날’도 국가기념일!

2024년 11월, 정부는 5월 15일을

‘세종대왕 나신 날’로 공식 지정하고

2025년부터 법정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이 날은 단순한 스승의 날을 넘어서,

세종대왕의 창조정신, 애민정신을 되새기는 날이 되었습니다.

 

 

 

 

 

📊 국민 인식은 아직 낮은 수준

문체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은 세종대왕의 생일이 언제인지, 왜 5월 15일이 스승의 날로 정해졌는지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여론조사 결과(세종대왕 나신 날 인지도) / 문화관광체육부 제공 출처 : 뉴스티앤티(http://www.newstnt.com)

 

76.3%가 세종대왕의 생일이 언제인지,

스승의 날과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10대의 인지율은 16.7%로 가장 낮았으며,

60대는 31.5%로 가장 높았습니다.

또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3.6%가

‘세종대왕 나신 날’이 법정기념일임을 몰랐으며,

64.6%는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응답했습니다.

🎊 제1회 ‘세종대왕 나신 날’ 축하 행사 성료!

2025년 5월 15일,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는

세종대왕 나신 날 축하 세계시민 한마당’이 개최됐습니다.

행사에는 국내외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고,

K-응원가, 축하 공연, AI음성으로 구현한

‘세종대왕의 말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습니다.

✍️ 세종대왕의 감동 메시지 (AI음성으로 재현된 내용 中)

“사랑하는 내 후손들에게 말하노라.
내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가다니,
참으로 기쁘도다…”

⚠️ 논란도 있었습니다: 일본 신사 영상 삽입 사건

행사 당일 경복궁에서 상영된 15초 리허설 영상에서

일본 신사의 사진과 중국 절의 건축물이 등장하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는 시민의 제보로 삭제됐지만, 영상 제작·검수 과정의 부실함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이에 서경덕 교수는 “정말로 몰랐다면, 문체부의 능력이 의심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영상 속 일본 신사 모습 [서경덕 교수 SNS 캡처]

👩‍👩‍👦‍👦 세종대왕의 애민정신도 재조명

이번 행사와 함께 세종대왕의 업적도 재조명됐습니다.

특히 여성과 백성을 위한 정책이 눈에 띕니다:

 

1426년: 여성 관노비에게 출산휴가 100일 부여

1430년: 출산한 달 추가 30일 = 총 130일 출산휴가

1434년: 남편에게도 30일 휴가

1430년: 전국 17만 명 대상 토지세 제도 여론조사 시행

🧠 정리하자면…

항목 설명
         항목                               설명
📅 날짜 5월 15일
🎂 의미 세종대왕 탄신일 (1397년 5월 15일)
📘 유래 스승의 날은 세종의 생일에서 착안
🏛️ 2025년 변화 ‘세종대왕 나신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
💬 주요 메시지 세종은 단순한 군주가 아닌, 백성을 위한 스승

✅ 마무리하며

세종대왕은 단지 한글을 만든 왕이 아닙니다.

그는 국민과 소통하며 애민 정신을 실천한 진정한 스승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매년 5월 15일을 그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자,

스승에게 감사하는 날로 기억해야 합니다.

올해는 ‘제1회 세종대왕 나신 날’이었지만,

앞으로는 모든 국민이 함께 기념하고 축하하는 진정한 ‘한글 문화의 날’로 자리 잡기를 기대합니다.

 

📌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

🤷‍♀️스승의 날이 세종대왕 생일이라는 사실

🤷‍♀️세종대왕의 생가가 복원 추진 중이라는 사실

🤷‍♀️세계시민이 함께 기념하는 날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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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을 기억하는 일, 우리말을 사랑하는 일은 지금 우리의 몫입니다.

 

 

 

 

 

🔍 더 생각해볼 이야기: “세종은 왜 세조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을까?”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와 애민정신으로 누구보다 위대한 성군이었지만,

그의 후계 구도에 있어선 아쉬움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우리가 ‘스승의 날’로 기리는 그 위대한 왕이,

정작 자신의 아들들과 나라의 미래를 둘러싼 선택에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 아래 글에서는 세종의 후계자 선택과

그로 인해 벌어진 조선의 권력 구조 변화를 중심으로,

‘완벽한 왕조차도 인간의 한계를 피할 수 없었다’는 시각에서 살펴보았습니다.

 

👁‍🗨 역사적 통찰을 통해 오늘을 돌아보고 싶다면,

꼭 함께 읽어보세요:

🏯 세종대왕의 후계 구도,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대하여

조선 역사에서 세종대왕은 단순한 성군이 아니라, 이상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을 진흥시켰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다방면에서 실현했습니다. 그러나 그 완벽한 리더십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선정과 권력 이양의 문제에서는 아쉬운 흔적이 남습니다.

👑 세종의 후계자, 문종의 취약함

세종은 장남 문종을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문종은 학식과 인품에서 뛰어났지만,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세종 또한 문종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상을 잇는 인물로는 문종이 적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문종의 재위는 고작 2년.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정은 급격히 불안정해졌습니다. 아직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권력은 김종서 등 신권 세력에 집중되었고, 이는 훗날 계유정난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 계유정난이란?

계유정난(靖難)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훗날 세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단행한 무력의 난입니다.

당시 어린 단종이 왕위에 있었고, 실권은 대신 김종서, 황보인  온건파 대신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은 1453 음력 10, 군사를 동원해 김종서를 제거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합니다.

 사건을 통해 수양대군은 정권의 실권을 잡게 되었고, 2 뒤인 1455년에는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됩니다.

🧠 세조는 이미 '인물'이었다

<2016년에 공개된 세조 어진 초본>

 

수양대군은 세종이 생전에 이미 그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인물입니다. 군사적 감각, 정치적 수완, 결단력 등은 형 문종과는 또 다른 리더십이었죠. 만약 세종이 아버지 태종처럼 현실 정치의 냉정함을 더 반영하여 후계 구도를 설계했다면, 수양대군에게 일정한 권한이나 역할을 부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김종서 세력의 독주도 견제할 수 있었고, 단종 역시 폐위와 죽음을 맞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조가 단종을 제거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실질적인 보호자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 이상과 현실, 인간의 한계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세종은 누구보다도 이상적이고 원칙적인 군주였습니다. 혈통에 따른 정통성, 유교적 명분, 왕권의 안정 등 이상적인 왕위 계승 원칙을 따랐고, 현실 권력 다툼보다는 정통성과 도덕성을 우선시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늘 이상대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태종은 칼로 왕좌를 얻었고, 세조는 칼로 정권을 빼앗았습니다. 세종이 이상에 치중했던 만큼,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는 어쩌면 인간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인간

우리는 때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인물에게서도 결정적인 약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문화·과학·정치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을 남겼지만, 가장 가까운 미래, 즉 자신의 왕조의 안정된 계승에는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으며, 때로는 가장 똑똑한 이조차도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다 지킬 수는 없는 것이 역사 속 진리인 듯합니다.

📌 맺으며

세종대왕이 수양대군을 조금만 더 신뢰하고, 권력의 한 축으로 인정했더라면 조선의 후계사는 더 평화롭고 안정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기 이전에 스승'이었고, '지도자이기 이전에 성인'에 가까웠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이상적이었지만, 역사는 그 이상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인간과 권력, 이상과 현실,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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